연말이다. 소화가 안돼 속이 늘 더부룩한 것은 여전하고, 내 방에는 보일러 가스냄새가 가득 차 있다. 나는 여전히 우울해 하고, 그 와중에 A모임은 방학을 했다. 월요일 저녁의 독서모임은 그대로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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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있는데, 문제가 생겼다. 모니터 속 커서가 사라졌다. 하얀 백지 위에 내가 멈춰선 곳이 어딘지 몰라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눈앞에 벌어진 작은 일이 요즘 내 삶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어느쯤에 서있는지, 나는 백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잘 모른다. 자고 일어나 깨어날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오늘 이 시간이 행복하고 기쁘지 않다. 앞으로 할 일을 계획하지 않고, 계획할 수 없다.
1년 내내 이랬던 것은 아닌데... 요즘의 나는 그렇다. 내일 오후 2시에는 두 어린 친구에게 한성대학교 피씨실에서 포토샵 강좌를 내가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런 작은 약속앞에서도 '아, 내일 시간에 잘 맞춰갈 수 있을까?' '조금 힘들다, 귀찮다, 뭘 해야하나?' 의구심과 걱정, 또 밋밋한 감정들.
영화 <체리향기>를 보았다. 그젯밤, 무슨 생각이 나서 위디스크에서 70포인트, 현금이 아닌 포인트를 내고 옛날영화를 다운 받아봤다. 내가 찾는 장면을 위해 열심히 리와인드와 빨리가기를 해대며. 찾던 장면은 못 찾았지만, 영화를 반쯤 시청하고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죽으러 올랐던 언덕에서 체리 몇 알을 만지게 됐고, 그 삶의 촉감에 자살을 관두기로 한다'는 유명한 <체리향기>속 일화가 주인공의 것이 아니었구나! 차를 운전하는 중년 남자 주인공의 옆자리에 탄 객, 노인이 자기 젊을 때를 회상하며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를 만난 것으로 주인공 남자는 자살에 목맸던 마음에서 좀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22살때 쯤 봤던 영화일 텐데, 나는 영화들을 제대로 봤던 걸까? 의문이 들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던 영화들 <스캔들>, <안개속의 풍경>.. 여러 것들의 중요한 내용을 모르더라 내가.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영화 스크린을 통해 펼쳐지는 사람들 이야기 속에서도 나는 반쯤 눈을 감고 살아왔던 걸까. A모임에서 배우고, 자괴감을 느끼며 깨닫고, 맞닥들이는 것들이 이런 것이다.
오늘의 독서모임에서 나는 '나의 한 주일 산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했는데, 잘 할 수가 없었다. ㅇ선생님에게 몇 주일 전 서운했고 답답했던 일을 띄엄띄엄 어눌하게 풀어놓은 뒤에, 차례를 넘겼다. "다 했어요" "한 주일 어떻게 살았는지는 얘기 안 해?" "음..."
나는 내가 멀쩡하게 살아온 줄 알았는데, 이를테면, 어릴 때 공부도 잘 했고(발표도 잘 했고) 대학교 때 학회에서 매주 토론을 하면 그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도 잘 했던 것 같고... 그래서 내가 크게 말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후에 알게 되었다. '내 이야기는 잘 못 하는구나...' 마음의 문제.
어제 있었던 내 일, 나의 속상한 이야기, 억울했던 마음, 누군가와 갈등하고 있는 속내, ... 이런 것들을 풀어내놓고 살지를 않았구나. 초등학교, 고등학교, ... 오래전부터의 내 역사를 더듬어 본다. '아, 정말 그랬구나...'
A모임에서 나를 깨나가는 작업을 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나를 듣노라면 억울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는데,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 내가 그렇게 이상하고 부족한 사람인가? ...' 대학 몇학년, 이후 몇년에 심했던 우울증 시절을 제한다면 친구들과도 사이좋고 무난한 나,로 살아왔던 것 같은데... 한다.
그런데 지난 증거들을 다시 돌아봤다. 5년 전 그 사람에게 보냈던 이메일들, 대학 모임의 카페 게시판에 내가 드문드문 쓰던 글들(2학년쯤 어릴 때부터 그 이후까지 다)...
지금의 눈으로 돌아보니, 나는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나만 아는 힘듦을 써놓을 때도 있었고 농담따먹기를 하느라 본심은 저 어디로 빠져버리고 중구난방의 글을 내뿜었다.
부끄럽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더 서글프고 아픈 일들이다. 이렇게 쓰고있지만 과연 정말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안쓰러워하는지, 내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을 적어내지 못한다. 말하지 못 한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조차 실은 모른다. ...이게 얼마나 큰 병인지, 그렇게 우리들은 만나왔던 건지.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B와 막되먹은 분위기로 관계가 깨어졌을 때 - 2003년 봄- 그때 나는 눈치도 없이, 아니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쿨하다는 듯, 이 정도쯤 나에게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카페 게시판에서 B에게 이리저리 대꾸하고 있었다. 그랬던 내 모습이, 이제는 딱하게 보였다. 그때 남자 B에 대한 내 마음이 어떤 것이었건 간에 한두 가지의 사건들 후 나는 결코 그를 향해 좋은 마음, 무심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었는데.. 그 3,4월에도 몇 달이 지나서도 참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해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덧. 요즘 사는 이야기
드라마 <천일의 약속>을 다운 받아보고, <나도,꽃>도 보고, 11월 생일선물로 오빠가 주문해준 [한국 시나리오 선집] 2001~2003도 가끔 읽고. 이건 눈에 보이는, 지극히 일상의 일부지만. 오늘은 밖에 있어도 안에 있어도 너무 힘들었다. 마음이 우왕좌왕, 어지러운 느낌.
시나리오 선집에 있는 <봄날은 간다>와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읽는데, 예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봄날은 간다>는 예전에도 워낙 좋아했던 영화지만, 그 영화에 등장하는 할머니, 아버지, 고모, ... 그런 인물들과 그 안에 있는 상우가 보였다. 감독 진호는 그래도 좀 따뜻한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보며. <살인의 추억>도, 김상경이 여중생에게 대일밴드 붙여주고 나중에 그 학생이 피해자 주검으로 발견되던 장면, '아, 정말 그렇게 작은 추억, 마음씀이 있었던 어린 학생이 그런 일을 보는 건 가슴 아픈 거겠다' 했다. 2002년 그때는 여성주의 시선으로 마냥 그 장면과 메커니즘을 비판만 했는데, 불쾌해 하기만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어떤 것들은 변했다.
변하지 않은 건 뭘까?
변하지 않은 게 있길, 원하나?
덧2
매일 일기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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